일용은 구멍가게 여직원한테 데이트를 거절당한 후로 언제나 만만한 태형에게 담배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태형이 껄떡지근한 얼굴로 신탄진 한 갑 주세요, 하면 그녀는 가느다란 눈을 더 가늘게 뜨고서 얘, 너 학생 아니니? 물었다. 태형은 더도 말고, 일용삼촌 심부름인데요, 했다. 여직원은 일용의 이름을 들은 이후로는 잔말 않고 담배를 척척 내주었다. 둘 사이에서 성가시게 이용당하는 모양새가 된 태형이었지만 그 덕에 맘껏 담배를 사다 피울 수 있었다. 물론 제 돈은 아니고 일용이 너 하라며 주는 잔돈을 모아서 어쩌다 한 번 사는 식이었다.
하지만 그 날은 일용의 담배 심부름이었다. 태형의 것도 다 떨어지긴 했지만은 새로 살 돈이 없었다. 당연하게 담배를 받아든 태형은 갖고 돌아오면서 몰래 한개피쯤 빼 피워도 삼촌은 눈치 못 채지 않을까, 생각을 했으나, 새삼스래 머리 위를 내리 쬐는 햇볕이 뜨거워서 말기로 한다. 1979년, 여름의 문턱이었다.
집 앞에 난생 처음 보는 검고 길다란 승용차가 대어져 있었다. 좀 더 가까워지니 태형네 집 앞이 아니라 맞은편인 석진네 집 문앞에 대어진 것이었다. 석진네 집에는 석진이 없은 지가 10년이 넘었다. 둘은 동갑내기에 똑같이 12월에 태어나서 말도 못할 때부터 붙어다녔다는데 태형의 기억은 희미했다. 어떻게 생겼었는지도 가물가물했다. 어디가 많이 아파서 요양간거라는 소문이 돌았었고 이렇게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옛저녁에 죽어버렸겠거니 여기기도 했다. 그래서 까맣고 무거워보이는 차를 보고는 설마 장례차인가, 생각했다. 석진네가 돈 많은 집인줄은 모르겠지만 요즘엔 저렇게도 한다는 걸 들었다. 태형은 보폭을 줄이다 줄이다 거의 멈춰 선 수준이었다. 차 뒷문이 열리고, 회색 카디건을 입은 말간 남자애가 내렸다. 뒷통수만 보고도 김석진이 여즉 살아있었구나 하고 알았다. 태형은 제 볼품없을 모습이 부끄러워져 멈추다시피했던 발을 얼른 다시 놀렸다. 보지마라, 보지마라. 고개를 푹 숙이고 젠걸음을 하는데 누가 말로 태형의 덜미를 붙잡았다.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가 제 이름을 뱉는 것에 한치의 거리낌도 없었다.
"김태형?"
태형이 석진을 뒷모습만 보고도 알아차렸듯 석진도 한 눈에 태형을 알아본 일이었다. 다만 태형은 모른척 하고싶었고 석진은 반가워했다는 것이 달랐다. 태형은 속으로 망했다, 하면서도 이미 못들은 척 하기엔 늦었다 싶어 비척비척 고개를 들었다. 10년만에 만나게 된 석진은 태형을 당황케 했다. 병이 있다더니 진짜 맨날 어디에 쳐박혀 빛도 못 보고 살았는지 온 얼굴이 허여멀건했다. 거기서 잘 먹고 잘 잤는지 태형보다 키가 조금 더 커보이기도 했다. 반갑다고 활짝 웃는데 어디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미국이나 그런 데에서 유학 갔다왔다고 해도 믿길 떼깔이었다. 학교때문에 머리털이 다 잘려나간 제 다른 또래들과 달리 석진은 귀를 적당히 덮는 길이의 보드라워보이는 머리를 하고있었다. 신기하게도 지금 얼굴을 보자 어릴 때 얼굴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그 때도 석진은 저보다 하얬다.
"오랜만이다?"
"…어."
웃는 눈을 상대하기가 어려워 태형은 괜히 시선을 아무데로나 끌어내렸다. 찍찍 끌고 나온 쓰레빠가 부끄러웠다. 머리통이라던지 억지로 숙인 얼굴 여기저기로 석진의 샅샅이 뜯어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다가 손에 그대로 쥐고 있었던 일용의 담배에 확 사로잡힌 눈길도 느껴졌다. 태형이 얼른 담배를 바지주머니속에 집어넣으며 간다, 하고 인사같지도 않은 인사를 했다. 붙잡을 새 없이 사라지는 뒷모습에 대고 석진이 외쳤다.
"나 여기서 다시 살아."
"…"
"앞으로 계속 살거야!"
콰당탕, 낡은 철문이 박살나듯 닫혔다.
하루아침에 바뀌어버린 잠자리가 익숙하지 않아 석진은 밤새도록 선잠을 잤다. 고집 부려 돌아온 고향인데 포근하지도 편하지도 않았다. 깜깜한 천장을 상대로 눈을 꿈뻑대고 있으니 별 잡생각이 다 들었다. 이러다가 갑자기 병이 도지면 어떡하지. 내가 쓰러져버리면 죽기 전에 도착할 수 있는 큰 병원이 여기에 있나. 내가 오늘 약을 때 맞춰 먹었었나. 운이 좋아서 안 죽고 그냥 계속 살 수 있을 리는 없으려나. 내가 그 책을 가져왔던가. 기타 피크를 어디 넣어뒀더라. 여기 새벽은 많이 추우려나.. -등등. 그러다 창 밖으로 푸른 새벽빛이 스며들어오는게 보일 즈음이 되어서는 석진은 다시 잠들기를 포기했다. 잠 조금 못잔다고 해서 유달리 더 피곤해지는 몸도 아니었다. 석진은 제 2층방의 창문을 활짝 열었다. 쌀쌀하고 촉촉한 공기가 방을 휘젓고 들어왔다. 맞은편의 낮은 집은 잿빛에 잠겨있었다. 낯선 풍경이었다. 석진은 그 집 지붕 위로 울리는 새소리를 귀담아 듣고 있었다.
털컹 하는 소리를 따라가보니 태형이 대문을 열고 나오는 중이었다. 위에는 티셔츠 한 장만 덜렁 입고 한 쪽 어깨에 체육관 가방을 매고 있다. 석진은 불러서 인사를 할까 말까 여러번 고민했다. 낮에 마주쳤던 태형의 모습이 생각났다. 태형인 상상보다 훨씬 더 멋있는 얼굴로 자라있었다. 딱히 대화를 나눈 것은 아니지만 목소리도 제 또래 안답게 중후했다. 그리고 그런 감상 와중에도 태형이 온 몸으로 저를 불편해 하는걸 석진은 알았다. 저를 보고 뻣뻣하게 숙여지던 목…. 석진은 그냥 태형을 부르지 않고 바라만 보기로 했다. 마른 뒷모습이 천천히 걷는가 싶더니 금세 푸른 공기 속으로 가볍게 뛰어 사라진다. 김태형은 운동 다니는구나. 석진은 10년만에 다시 만난 저와 태형이 새삼 너무 다르다고 생각했다. 이 날 석진은 밥 먹을 때를 빼곤 하루종일 창가에 앉아 태형이 뛰어간 길목을 바라보았다.
"너…"
"와, 안녕, 우연의 일치."
"뭐냐?"
"뭐기는, 학교가지."
평소처럼 집을 나서는데 등교하러 나오는 길이던 석진과 딱 마주쳐버렸다. 더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건 석진이 끔찍히도 바르게 쓴 학생모였다. 가운데 박힌 한자가 제 가방속에 쳐박혀있는 그것과 똑같았다. 왜 하필 화양고냐고 따져묻고 싶었는데 저랑 같은 학교인 게 석진 잘못인 것은 아닐 터였다. 태형은 말을 삼켰다.
"표정이 왜그래? 나 학교가는데 불만있냐?"
"염병."
싱긋 웃으며 농을 걸어오는 석진에 태형은 저도 모르게 얼른 상스런 말로 대응했다. 이대로 같이 등교하는 상상이 머리를 빠르게 스쳤다. 못 할 짓이다. 태형은 석진을 세워두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짜피 매일 아침 달리기 때문에 집을 나서는 것이지 학교를 가기 위함은 아니었다. 석진을 무시하고 얼른 뛰어가는 속도가 평소보다 조급했다. 점점 작아지는 등을 보며 웃고 있는 석진을 태형이 알 리 없었다.
담임은 석진이 제 반으로 오게 된게 흡족했다. 고등학교를 다닌 적이 없는 석진이라 원칙대로라면 1학년에 라 하지만 시험 성적이 좋아 바로 월반을 했다. 몸이 허약해서 사고치러 나돌 일 없을 것도 한 몫 했다. 담임은 석진과 함께 교실로 오면서 학교 아이들의 흉을 봤다. 요즘엔 하라는 공부도 안하면서 맨날 대학 가겠다고 헛소리 지껄이는 놈들이 지천이다. 허구한날 사고치는 골 빈 놈들, 김일성 사상에 물든 골 썩은 놈들. 대학생 되어봤자 공부는 커녕 쓸 데 없이 데모나 하고 다니지 않느냐. 지들 공부하라고 키워주는 나라 생각을 안 한다. 우리반엔 그래도 그런 애들 아직 없다. 혹시 모르지, 나 모르게 그럴 지는. 딴에 다 큰 줄 알고 아주 속이 시커먼 놈들 뿐이다. 석진이 너도 친구 잘 가려서 사귀고 공부나 열심히 해라. 조용한 복도에 담임의 협박같은 충고가 웽알웽알 울렸다.
교실 문 앞에 다다랐을 때에야 석진은 간신히 입을 뗐다. 저, 선생님. 석진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담임은 문틈에 손을 집어넣다 말고 석진을 돌아보았다. 어설프게 웃고있는 얼굴이었다.
"저, … 저 몸… 아픈거요….”
"애들한테 말하지 말라고?”
“예…."
"녀석아, 말 할 생각도 없었다. 네가 알아서 잘 하겠거니. 난 또 무슨 이야기 한다고."
"예."
"들어가자."
사실 석진은 오는 내내 저 혼자 머릿속이 바빠 담임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담임보다는 같은 반이 될 아이들이 더 겁났다. 어중간한 시기에 전학와버려서 제대로 못 섞이고 내내 겉돌까 걱정이 되었다. 아프다는 것까지 알려지면 어울려줄 애들은 더더욱 없어질 것이다. 아는 애가 하나라도 있으면 좋을텐데, 친구랄 건 고작 태형뿐이다. 친구, 라고 하기엔, 걔가 날 너무 서먹해하지만…. 어쨌든 태형인 나 아픈거 알긴 알테니까. 들어갔을 때 교실에 태형이가 보이면 좋겠다. 그럼 다른 친구 못 사겨도 상관 없는데. 그럴 리는 없겠지. 석진은 주먹을 꼭 쥐고서 담임의 뒤를 따랐다. 설렘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낯선 긴장감이었다.
“김태형이는 왔냐?”
제게로 쏟아지는 아이들의 시선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어정쩡하게 서있던 석진은 다짜고짜 담임이 하는 소리에 귀를 의심했다. 동명이인인가? 아득한 교실 맨 뒷줄에서 누구 하나가 슬그머니 손을 드는게 보였다. 예, 하는 낮은 목소리도 들릴듯 말듯 들렸다. 모자를 써 잘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석진은 제대로 보지도 않고 알았다. 제가 아는 그 김태형이 맞다. 석진의 얼굴로 환한 반가움이 삐져나왔다. 손을 흔들고싶었다. 또 만났네 하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태형이도 나를 알아봤겠지. 얼른 아는 척을 하고싶다.
"쥐새끼같은 놈, 오늘도 안 오면 느이 아버지 찾아가려고 했더니. 이러지 말고 편하게 자퇴하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하냐."
담임이 태형에게 시선 한 번 제대로 주지 않고 말했다. 석진은 당황해서 담임을 한 번 쳐다보고, 먼데다 그늘져 잘 보이지 않는 태형의 얼굴을 한 번 살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 담임은 석진을 옆에 세워두고 출석부를 부르기 시작했다. 예, 예, 단조로운 대답들이 메아리처럼 교실 곳곳에서 튕겨나온다. 60명 가까이 되는 길고 긴 목록을 담임은 석진을 의식해 일부러 하나하나 읽었다. 그러나 소음밖에 되지 않는 허식이었다. 석진은 먼 그늘 속 태형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조례를 끝내며 태형을 데려간 담임은 종례시간에 다시 나타날 때 홀로였다. 김태형이, 김태형! 허공에 대고 외치더니 설마 또 토꼈냐고 광분했다. 이 자식은 내가 패는 걸로 안 되는 놈이네. 지 아버지 귀에 들어가는건 벌벌 떨고 선생은 선생도 아냐? 오늘 간만에 어디 죽어봐라. 석진은 저가 무슨 말을 할지도 모르고 손을 번쩍 들었다.
"어, 김석진."
"걔 벌청소 받으러 갔어요."
석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말하면서도 무슨 소릴 하고있는건지 모르겠다. 무작정 내뱉고 보니 수습할 길이 막막했다.
"어디에 뭐때문에?"
"그,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뭐?"
“…그냥, 어떤 선생님한테 혼나고 밀대 들고 가는 것만 봤습니다."
"어떤 선생님?"
"그…"
"…"
"키가 한 이만…하시고."
하면서 석진은 공기중에 제 팔을 아무렇게나 가로저었다. 입술이 바짝 말랐다. 담임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석진의 얼굴을 샅샅이 검사했다. 아이들의 의아한 시선이 쏟아지는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평소에도 잘 하지 않는 거짓말인데, 척 봐도 난폭해보이는 사람을 속이려 드니 심장이 무섭게 벌렁거렸다. 30년같은 3초였다. 눈초리를 거둔 담임이 교편을 의미없이 휙휙 고쳐쥐었다. 우리반 망신은 김태형이 다 시키네. 쩝. 반장, 인사.
-차렷, 열중쉬어, 차렷, 선생님께 경례!
석진은 거의 책상에 코를 박고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석진은 이름 한 번 부르지도, 문 한 번 두드리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태형네 집으로 쳐들어갔다. 마당 구실 않는 좁다란 흙바닥을 지나 거침없이 낡은 마루 위로 올라선다. 태형의 방을 제 발이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문을 열자 속좋게 누워 자고있는 태형이 단박에 보였다. 야! 석진이 소리를 빼액 질렀다. 놀라 잠에서 튕겨 나온 태형이 눈을 부릅뜨면 석진의 반듯한 모자가 곧장 얼굴로 날아들었다. 코에서 흘러 내리는 학생모를 집어들고 한 박자 느리게 석진을 알아본다. 멍한 얼굴이었다.
"너 어디 갔었어?! 담임이 너 어딨냐고 해서 청소 하러 갔다고 내가 거짓말까지 했잖아!"
단잠에서 추방당한 목소리가 칼칼했다. 누가, 거짓말, 해달랬냐. 겨우 음성을 쥐어짠 태형이 다시금 목을 투박하게 가다듬었다. 석진은 열불이 뻗칠 지경이었다. 너...! 까지 외친 석진이 태형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석진의 머리 위로 김이 씩씩 올라오는게 보이는것 같았다. 석진은 부스스한 몰골의 태형을 한참 분하단듯 노려보더니 어깨까지 부풀어오를만큼 깊게 심호흡했다. 곧 나오는 목소리는 훨씬 차분했다.
"너 학교 제대로 안 다니냐?"
"네가 무슨 상관인데…"
"야! 그렇게 말하지마!"
두 문장도 못가고 평정심이 깨졌지만.
"소리 좀 그만 질러라.."
태형이 한 쪽 귀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귀 따갑단 시늉을 했다. 석진은 한참 째려보기만 하다가 말 없이 태형의 무릎 위에 떨어져있는 제 모자를 훽 낚아채갔다. 그리고는 학교때문에 죄다 짧게 쳐버려 잡힐 것도 없는 머리카락을 습관적으로 매만지고 모자를 살살 눌러가며 각을 잡았다. 몇번이고, 몇 번이고, 건드린 데를 또 건드리면서. 태형은 석진의 댓발 튀어나온 아랫입술과 무의미한 손짓을 위 아래 왔다갔다 하며 훑었다. 삐졌다고 시위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뻔하게 마음이 드러나는 얼굴이라 어쩐지 우스웠다. 티내진 않았지만 입꼬리 정도는 삐죽 올라가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짧은 침묵을 깨고 석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너 같은 반이어서."
"..."
"얼마나 다행이었는데..."
"..."
"근데 네가 없어져버려서 오늘 얼마나..."
석진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다시 입을 앙다물었다. 한참 정성스레 매만지던 모자를 아무렇게나 푹 눌러쓰고는 내려둔 가방까지 챙기며 됐어, 하고 몸을 일으켰다. 가려는 모양새였다. 태형은 석진이 너무 솔직해서 당황스러웠다. 지가 하는 말이 나한테 어떻게 들리는지는 알고 말하는건가 싶었다. 어떻게 해줘야 해. 잘 가라고 인사해? 가지 말라고 붙잡아? 미안하다고 해? 오늘 얼마나, 그 다음 뭐냐고 캐물어? 어쩔 줄 모르고 일단 머리를 긁적이며 덩달아 몸을 일으키는데 석진이 새침하게 됐다니까, 왜 일어나, 계속 쳐 자, 했다. 새침이 아니라 빈정이었다. 태형은 이 쯤 되니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렇게 미움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편 들어달라고 한적은 커녕 먼저 알아서 석진을 피해다닌게 지난 이틀의 전부였다. 10년 전에나 흙장난 하던 게 뭐라고 너는 시킨 적도 없는 거짓말을 하고, 내가 학교 다니는것까지 신경쓰고 드냐. 맞불로 따져묻고싶은 마음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지만 태형은 마루에 걸터 앉아 신발을 꿰신는 석진의 뒷모습만 쳐다볼 뿐이었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분명히 엄청 친한 친구였다고 했는데, 태형은 뭣 하나 석진에게 쉽게 할 수 없었다. 석진은 제게 이렇게나 솔직한데 태형은 그럴수록 뒷걸음질을 쳤다.
"담임이."
신발을 다 신은 석진이 뜬금 없는 말을 꺼냈다.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 뒤돌아서는 얼굴이 제법 낯설고 초롬했다.
"너 죽여버린다 그랬어."
"그 소리 맨날 한다."
"너네 아버지 어쩌고 저쩌고 했어."
"…"
"…아버지는 너 학교 이렇게 다니는거 아셔?"
심드렁하던 태형의 표정이 석진의 말에 싸하게 굳어버렸다. 석진은 태형의 바뀐 기분을 알아봤으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태형과 학교에 같이 다니고싶다. 무슨 소릴 해서 무슨 미움을 사더라도 상관 없다. 두 사람의 손에 다른 의미로 힘이 들어갔다.
"아까 내가 말 안 했냐?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아래에 꾹꾹 눌러담듯 낮은 목소리였다. 단단히 말려 쥔 주먹이 다부지게 꿈틀대는게 보였다. 저걸로 맞으면 많이 아프겠지. 석진은 최악을 상상하면서도 작정한 입을 멈출 수는 없었다.
"친구가 이정도 걱정도 못 해?"
"누구 맘대로 친구래? 갑자기 나타나서는, 친구? 너랑 내가? 난 너 모르고 알고싶지도 않거든."
"…"
"남한테 볼 일 없으니까 꺼져."
"…"
"꺼지라고!"
"…너 내일 학교 간다고 약속하면."
"아, 씨발… 허….”
욕을 하고 모질게 굴어도 석진은 땅이 발에 박힌듯 단단히 서있었다. 위협이 씨알 하나 안 먹혔다. 도대체 내가 학교 가는게 너한테 뭐가 그렇게 중요한 일인데, 석진을 다그치며 묻고 싶었다. 태형은 다만 머리를 벅벅 헝크러뜨릴 뿐이었다. 그냥 이제는 좀 눈 앞에서 사라져줬으면 좋겠다. 왜 나타나자마자 제 인생에 이렇게 침범하려 드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 친구 아냐, 너 내일 학교 가든 말든 알아서 해."
"그럼 됐…"
"대신 난 너희 집 앞에서 해 뜨기 전부터 너 기다릴거야."
"…미쳤냐?"
"해 뜨기 전부터 기다려서 너 나올 때까지 기다릴거야."
"평생 기다려, 그럼."
"어, 너 올 때 까지 평생 기다릴거야."
"…"
"내가 학교 못가면 그거 네 탓이다."
밀가루같이 생긴게 눈을 단단히 뜨고는 비장한 말투다. 선전포고한 석진은 이정도면 충분하다는 듯 굳센 얼굴로 휙 돌아서 좁은 마당을 쿵쾅대며 걸어갔다. 문이 부서질듯 콰당탕 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번지고 한참 후에야 허름한 집이 평소처럼 적막해졌다. 태풍이 한바탕 몰아치고 간 듯 했다. 태형은 한 쪽 발에만 슬리퍼를 신고 삐뚤게 서서 멍하니 석진이 사라진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쩜 이렇게까지 겁 안 나는 협박이 있지. 동네 똥개가 한껏 앙앙대며 짖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것 만큼 거슬리고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것도 또 없다.
태형은 다시 잠들 수 없었다. 늘 아무렇게나 베고 자던 사전이 새삼 불편했다. 똑바로 누웠다가, 자세를 고쳤다가, 결국엔 벌떡 일어나 죄 없는 이불을 확 걷어찼다. 학교에 갈 마음은 추호도 없다. 다만 정말 새벽부터 나를 기다리다 몸도 약하다는 게 감기라도 걸리면 그건 설마 내 탓일까 수십번 헤아렸다. 시퍼런 골목길, 희미한 가로등 아래서 나오지 않는 자신을 기다리며 쿨럭이는 석진이 보이는 듯 해 제 짧막한 머리를 벅벅 긁어 괴롭힌다. 태형은 노을도 지지 않은 하얀 오후에 홀로 앉아 닥치지 않은 새벽을 몇 번이고 그렸다.
수정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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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로 풀 때 꽂혔던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