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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 신기루

w. 시적정의




폭염, 숨막히는 고요, 새하얀 태양








 새하얀 티셔츠를 입은 석진이 멀리서 달려와 지민에게로 거세게 안겨들었다. 어깨와 허리를 감싼 팔이 몸을 가득 끌어안는다. 키도 어깨도 한 뼘은 더 클 석진이 응석을 부렸다. 고개를 잔뜩 숙여 지민의 어깨에 머리를 파묻고는 웅얼웅얼 말하는 목소리가 애달팠다. 박지민, 보고싶었어 지민은 석진이 혹시 우는건가 걱정이 들어 몸을 떼어놓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형, 울어?」 허리를 감은 팔이 단단하게 조여들었다. 붙잡고 뜯어내려 할 수록 더 지민을 죄였다. 형, 이것 좀 놔 봐. 형, 왜 울어. 애를 쓸수록 석진의 악력이 더 세졌다. 몸까지 떨며 서럽게 흑흑 운다. 어찌나 많이 우는지 지민의 옷이 죄다 축축하게 젖어갔다. 이렇게 울다가 탈수로 죽어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콸콸 울었다. 점점 석진이 정신 나간 처럼 울기만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형, 형? 석진형? 지민의 몸부림이 커졌는데 석진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힘이 셌다. 숨통을 조여 죽이려는 사람같았다. 형! 소리를 확 지르자 눈이 번쩍 뜨인다. 꿈이었다.


 방이 밝았다. 자는동안 몸부림을 얼마나 친건지 온 이불이 제 몸을 어지럽게 휘갑고 있었다. 티셔츠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이래서 그딴 꿈을 꿨구나.. 다리 사이에 엉켜있는 이불을 밀어내고 끈적한 티셔츠를 털어냈다. 예약을 맞춰둔 선풍기가 꺼져있다. 다섯시 십분. 여름의 정점에 해가 뜨는 시간이 일러졌다. 열대야가 불쾌하게 달군 공기가 사방에서 기승을 부린다. 고요했다. 천장을 바라보면 꿈 속 석진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물칠을 한듯이 흐려진 얼굴. 예감이 좋다고 해야하나, 안 좋다고 해야하나, 꿈 같은 걸로 하루를 점치는 미신론자는 아니었지만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보고싶었다고 그랬나. 날 떠난건 자기면서.


 태형일 만나기로 한 시간은 오후 두시. 그것 말고 다른 할 일은 없다. 원래 열두시 쯤에 일어나서 아점 먹고 바로 나갈 참이었는데 이렇게 일찍 일어나버리다니 망했다. 게다가 이렇게 더워서 어떡하지. 오후 두시면 지금보다도 훨씬 더 뜨거울 것이다. 끔찍한 예상에 지민이 앓는 소리를 내며 발가락으로 선풍기를 켰다. 심약한 미풍이 피부 위를 기어간다. 멍하니 누워 팬 돌아가는 소리를 듣다가 휴대폰을 켜 태형에게 문자를 쓴다. 야 오늘 안 만나면 안되... 거침 없이 움직이던 손가락이 뚝 멈춘다. 생각해보니 태형조차 만나지 않으면 하루종일 집에 쳐박혀서 아무것도 안 하고 석진 생각만 하게 될 것 같았다. 휴대폰의 하얀 불빛조차 얼굴을 데우는 것 같다. 그냥 보내지 않고 휴대폰을 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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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민은 20분째 길을 헤매는 중이었다. 입 안엔 욕이 한가득한데 소리내어 말 할 기운도 없다. 대신 얼굴 전체가 욕주머니처럼 부루퉁해져버렸다. 머리 꼭대기에 뜬 태양이 저만 비추며 집요하게 따라오는 것 같았다. 큰 길이니 사람이 좀 보여 마땅한데 다들 폭염주의보에 실내로 숨어들었는지 지민 혼자 뿐이다. 드문 드문 서있는 가로수는 매미한테 점령당해 귀 따가운 소리를 냈다. 태형이 말한 카페를 찾을 수가 없다. 프렌차이즈 카페가 뭐가 어디가 어때서, 커피에 빠졌다는 태형은 요즘 곧 죽어도 개인 카페를 고집했다. 상표만 알려주고 하얀 건물 2층이라고만 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여기 건물들은 죄다 하얗고 길바닥도 하얗고 하늘도 내 눈 앞도 하얀데. 정신이 혼미해져 매미 비명마저 물 속에서 듣는 소리처럼 웅웅 멀어졌다. 아스팔트 차로에서는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반대편 길의 건물들이 일렁였다. 지민은 이제 제가 뭘 찾는지도 모르고 관성적으로 걷기만 했다. 공기중에 산소가 부족하다고 해야 할까. 몸이 뚝뚝 녹아 흐를 것만 같았다. 숨막히는 고요함.


 횡단보도 앞에 캐리어를 쥔 사람이 한 명 서있었다. 지민이 발걸음을 빨리 했다. 초록불이 되기 전에 가서 태형이 말한 카페가 어딨는지 아느냐고 물어볼 생각이었다. 이 날씨에 그래도 걸어돌아다니는 사람이 나 하나는 아니구나, 그렇게 생각하자 귀가 트였다. 쨍하게 울리는 매미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차도 별로 다니지 않는데 도로만 쓸 데 없이 넓어 신호가 길다. 남자는 묵묵히 빨간 불 앞에 서있었다. 자동차 신호등이 노란 불이 되었다. 남자의 뒷모습에 눈을 고정한 지민이 가볍게 뛰었다. 그런데 뭔가...


 저 어깨, 저 등, 키, 자그마한 뒤통수, 팔의 모양, 서 있는 다리의 자세... 기시감이 고개를 들자 지민의 발걸음이 속절없이 느려진다. 하얀 티셔츠, 하얀 티셔츠를 입고 있어서... 꿈 속에서도 꼭 저렇게 새하얀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초록불이 켜졌다. 띠띠띠띠, 빠른 간격으로 나는 신호등 소리가 지민의 뇌를 주무른다. 캐리어를 쥔 석진의 뒷모습이 천천히 나아간다. 넓은 횡단보도를 유유히 홀로 걸어가는 마른 뒷모습. 하얀 하늘, 하얀 길, 하얀 건물, 작렬하는 태양열, 지민은 더위를 먹었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매미 소리에 미쳐버렸다고도. 뇌의 어딘가가 고장난게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환상을 믿고 전속력으로 달릴 리가 없으니까.


 만일 신기루라면, 내 손이 닿기 전에 더 빨리 멀어지게 해주세요. 지민은 누구에게 비는 건지도 모르고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악물었다. 신호등의 화살표가 세칸 남아 있었다. 정신 없이 뛰느라 흔들리는 시야로 석진의 등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눈 앞이 어지러웠다. 아지랑이 때문에 일그러지는 건가 하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신호등 마지막 한 칸이 깜빡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신호등의 소리가 멈추고 초록 불이 빨간 불로 바뀌는 순간 지민이 손을 뻗었다. 단단한 어깨가 잡힌다. 석진이 뒤를 돌아본다. 갈색 눈동자와 마주하는 순간 매미들이 찢어져라 울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른다. 놀란 얼굴이 눈 앞의 지민을 믿지 못한다.


 와락 껴안아버렸다. 석진의 캐리어가 우당탕 넘어진다. 왜 이제야 왔느냐고, 그 동안 무엇을 하고 어떻게 지냈느냐고, 내가 보고싶지 않았냐고, 묻고 싶은 말들이 순서도 없이 뛰쳐나올 것만 같아 지민은 울음으로 목소리를 눌러삼켰다. 대신 제 품에 가득한 석진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이마저 환상이진 않을까,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붙잡으면 금방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어깨에 얼굴을 묻자 지금껏 너무 오래되어 떠올리지조차 못했던 향기가 되살아난다. 심장이 울컥 울컥 뛰었다. 마른 등과 팔, 빗장의 뼈같은 것을 한데 만지고 안았다. 그 어느 하나라도 나를 두고 가지 못하도록.


 "김석진, 보고싶었어."


 목소리가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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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연작 1 ??

스토리는 없습니다 그냥 이 장면이 보고싶어서 무작정 쓰기 시작한,,.. 앞뒤사정은 마음껏 상상해주세요 헤헷~~^ㅁ^

이 글 읽으시는 모두들 그리워 하던 사람을 만나게 되는 여름 보내시길 바랍니다. 고럼 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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